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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레/N

26.01.01

haru_FLN 2026. 1. 1. 02:15

 

첫 눈이 내리면 빌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가끔 예상이 안되는 날이 있다.

일이 끝나고 나서 내리는 소나기라든가, 돌발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강하게 부는 돌풍 같은 것들. 평소였다면 운이 나빴다고 홀로 중얼거리며 금방 털고 일어나려 애썼겠지. 혹은 그냥 넘어가려고도 했을 거고. 레이크 메리엘에겐 그게 편했으니까. 

그러니 예상이 안 되는 것에, 타인의 도움을 바라는 건 사치라고 ... 

 

"아," 

 

물 색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파도가 흐트러지고 베일이 순식간에 날아 갈 것 같아 손을 들기도 전,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갈무리해주는 손의 온기에 레이크는 웃었다. 평소였다면 혼자 수습했을 일을 먼저 해주는 이는 얼마나 다정한가.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손 끝이 겨울에 덮혀 차가운데도 따뜻하다 느끼는 건 몸에 베인 배려 탓이겠지. 익숙해지면 곤란하겠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그 손길에 긴장하지 않은 건 언제부터 였더라. 따라 흐릿한 인영의 목도리를 매만져주고 고맙다고 덧붙이면서도 시기를 알기가 어려워 속으로 침음했다.

예상이 안 되는 것에 타인의 도움을 바라는 건 사치라고 생각 했던 때가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가능하면 눈 앞에 있는 이를 돕고 싶었지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그래, 그렇게 된다면 기대게 될테니까. 차라리 철저하게 이용 당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으레 예상하지 못했던 날처럼 리완은 제 옆에 남아 생활 범주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다정하고도 약한 당신에게, 이용 하고 싶은 만큼 이용 당해주리라 다짐 했는데도 그 변덕을 예상하지 못해 당황하고 마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러고보니 오늘 눈이 올 수도 있대요."

 "눈이요?"

"네, 슬슬 올 때가 되긴 했죠. 그래도 해가 딱 바뀔 때니까, 오히려 행운일지도 몰라요. "

 

그럼에도 레이크에게 리완은 늘 고맙고도 좋은 사람이라서,  그가 이타적인 사람이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제게는 그리 굴어주니 약해지고 말아서, 어느새 가을이 지나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함께 서 첫 눈과 새해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앞으로에 대한 구상을 하고 만다.  언젠가 새로운 파트너가 생긴다면 떠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까지 옆에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 건 우리의 암묵적인 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면서도. 

 

'첫 눈과 관련된 속설에는 여러가지가 있잖아요. 그 중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네, 뭐 들어는 봤습니다만.' 

'이번에 눈이 오면 같이 소원 빌어도 괜찮겠네요.'

'그런 거 다 미신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맞춰주는 그가 다정했기에, 죄책감으로 이어진 과거와 성향이 합쳐져 이타심으로 점칠되다 못해 절여진 본인을 이해하지 못할 텐데도 옆에 있어주는 당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타인과 몸을 섞는 것 또한 남이 보기에 있어 선을 넘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이크의 생각에 그 건 리완에게 있어 선을 넘는 행위가 아니라고 단정 했기에 무엇을 하든 파트너인 건 변하지 않으리라 말했다. 그런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가진 감정이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그리고 저 또한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 

그러니 나름대로의 기준을 두고 선을 넘지 않으려 하며, 불안정하게 선 레이크는 종종 그와 이후를 생각하는 것 역시 선을 넘는 건지 가늠하게 된다. 리완을 향한 감정의 상자에 애정을 고이 접어 넘칠 정도로 넣어 놓았음에도, 그가 이 상자를 열어봐도 상관 없다 여기면서도 리완의 상자는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게 레이크 였으므로. 그의 상자가 자물쇠가 잠겨 있다 여기며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게 그였으므로. 설령 손에 쥐어져있어도 열어볼 용기조차 없으므로. 그러니 제 나름대로의 제멋대로 된 기준을 정해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결국, 어느 정도가 적당하고 먼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거다.

 

"리완은... 첫 눈이 오면 무슨 소원을 빌래요?" 

"글쎄요, 내일 일 가는데 차가 안 막혔으면 좋겠네요." 

"앗, 현실적인 소원."

 

그리고 그 선을 알기 위해 미래에 대해 말하려 하면,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어쩌면 이미 당신에게 기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파트너라고 명칭 지어 리완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건 제가 아닐까. 그를 억지로 붙잡아 나아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를 약속하게 되면 결국 저 또한 그의 다정함과 책임감을 이용하려는 것과 같지 않나, 하고. 

끊임없는 과거의 잔재가 저를 괴롭힌다. 그렇기에 종종 뒤돌아 제 발자국을 보며 고민하게 된다. 감정을 속여 얼려놓은 찬 공기를 멀리하지 못해 애써 웃음기가 섞인다. 똘똘 뭉친 거짓에서 진실을 읽어내려 애쓰기보단, 모든 말이 거짓이더라도 상관없다 여기며 현재의 그에게 충실하려 애썼다. 사실 어쩌면, 거짓이라 여기려 애쓴다. 쉽게 알 수 있는 진실을 손에 올려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면 정말 그의 말에 휘둘릴테니까. 어쩌면 이미 휘둘리고 있으니까. 보게 되면 정말 함께 걷는 게 당연하다 여길 것 같아서. 

 

"아, 마침 딱 맞게 오네요."

 

늦게 일이 끝나 별과 달 아래 인공적인 빛에 의지하며 걸어가고, 구경하자는 제 말에 이러다 얼어죽을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들어주는 그를 따라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하나 둘 떨어지는 새하얀 눈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한 손을 든다. 습관처럼 저를 부축 해주는 손은 여전히 맞잡은 채로.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엔 거리낌이 없어 그에게 새하얀 눈이 좋다고 말했다. 봄의 벚꽃처럼, 여름의 푸른 하늘 처럼, 가을의 단풍처럼, 계절을 알려주는 수단이 되니까. 발에 닿이는 감촉이 땅 위에 서있다는 증명을 해주는 것 같아서, 겨울철의 새하얀 풍경이 여전히 아름다워서,  새로운 시작의 직전 고요함을 품에 안아 단 하나에 집중 할 수 있게 해줘서, 살 에는 추위에 아프더라도 온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서, 어쩌면 끝과 시작을 생각할 수 있는 날이라,  그리고 어쩌면 죽음에 맞닿아 수 없이 후회 할 수 있게 해줘서 ... 

얇은 장갑 아래의 손에 감각이 무뎌져도, 손을 뻗으면 스며드는 새하얀 눈이 흐릿한 시야에도 선명하게 와 닿는 것 같아 웃음이 샌다. 이리 보니 예쁘죠? 덧붙이면서도 제 손을 바라보다 고해하듯 입을 열었다.  

 

"저는 -..."

 

"저는 리완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빌었어요." 

 

머물러주길 바라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저를 좋아해줬으면 해서 이야기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제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그럼에도 언제고 떠날 수 있는 당신을 위하여, 손이 얼어 붙기 전에 제 손을 잡는 온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기에 상자를 열어 보여주게 되는 것 뿐이다. 당신이 혼자가 되더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따뜻했으면 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도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서, 사실 어느 한 구석에선 아주 조금은, 오래 제 파트너로 있어 주었으면 해서. 언제 떠날 거냐는 말을 묻기엔 용기가 없어서, 차마 내년에도 함께 볼 수 있냐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아 도망칠 구석을, 떠날 수 있는 구색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잘했죠?"

 

그러니 어쩌면 내년에는 떠날지도 모를 당신이지만, 그럼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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